우체국FC 체험수기
고객 감동은 또 다른 고객으로 이어지며, 당신이 보여준 열정은 성공으로 돌아갑니다.
보다 풍요롭고 행복한 내일을 위해 고객님 한 분 한 분의 꿈과 희망을 소중히 키워 나가는 우체국 FC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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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봄빛, 우체국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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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방우정청 장흥우체국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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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좋은 나라인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4계절이 뚜렷하여 더욱 그러하리라.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들이 녹아 온천지가 봄빛에 졸졸 시냇물이 흐른다.
땅이 녹아 꽃잎이 삐죽삐죽거리는게 봄이 오는 소리다.
질서에 의해 자연이 움직이듯 이 마음속에 웅크려 있던 우체국보험이 새싹처럼 싹튼다.
겨울, 봄, 여름, 가을 인생의 계절이다.
위기와 기회가 연속되는 삶 속에서 나와 우체국보험과의 인연은 위기에서 기회를 경험하게 하였다.
겨울을 녹이는 봄빛처럼 그렇게 우체국과 인연이 되었다.
나의 청춘은 우체국보험이다. 30세의 나이에 우체국에 입사해서 지금 60의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나의 청춘을 기록으로 남겨 나와 같은 길을 가는 후배들에게는 격려와 응원으로, 나의 샘물 되어 주었던 우체국에게는 감사를 전하고자 한다.
우체국보험을 시작했던 첫 번째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가난한 장남 며느리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박봉의 가장을 둔 생활고는 나가서 돈을 벌어야만 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시간 낭비하지 않고 내 속의 잠자는 재능을 깨우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당시 난 주변의 심한 반대를 뿌리치고 우체국으로 직접 가서 보험 일을 하겠다고 했다. 나의 결단은 샘물을 얻는 결과물이 되었다.
돈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돈의 위력은 나에겐 능력이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무기가 되어주었다.
나는 전업주부의 푯말을 떼고 능력 있는 여성이 되었다.
“어느 곳에서든지 제 역할을 하면서 유익한 자의 모습이 되리라. 내 안의 잠자는 재능을 끄집어 내리라“ 다짐하며 우체국 보험관리사를 시작했다.
그 당시 다보장3형 13,950원은 인생을 바꾸는 계기였다.
보건소 직원이었던 박○○ 청년에게 다보장 보험을 권했다.
한 건 들어준다는 식으로 나에게 가입해주었는데 그 보험을 계약 했을 땐 말 그대로 산모가 아이를 출산한 듯한 기쁨이었다. 하늘을 나는 듯했다. 수없이 두드렸던 대문, 인사와 웃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모습, 발이 퉁퉁 부어서 아파했었던 그 결과물이었다. 그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다짐하게 했던 가슴 설레는 계약이었다.
그러다 가슴 철렁하게 내려앉은 사고가 났다.
가입한 후 3일 만에 교통사고가 난 것이었다. 박○○ 청년의 사망이었다.
시골 막내 외동아들의 사망을 겪은 누나 4명과 노부부의 모습을 보니 위로조차도 못 하고 한참을 서 있어야만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는 표현도 어색하지 않았다.
외동아들을 잃은 노부부의 아픔, 미처 갚지 못한 자동차 대출금을 독촉하는 직원, 노부부는 복 없는 늙은이란 스스로의 꼬리표 때문에 논도, 밭도, 집도 다 팔고 고향을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고통 속에서 나의 역할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6천만 원이라는 30년 전의 금액은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고향도, 논도, 밭도, 집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노부부와 누나들과 형제들은 나를 천사라고 불렀다. 그래 난 천사였다. 권해 주었던 이유 하나뿐이었는데 난 그 가정의 천사가 되어있었다.
이 사건을 겪고 가장 큰 변화는 우체국보험을 향한 나의 다짐이었다.
“이런 영업을 하리라! 준비시켜 위험에 대비케 하리라! 유익한 자로 살아야 한다는 인생철학을 이곳에서 펼치리라!”
스스로 세뇌하며 준비시키고 알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꼭 많은 사람들에게 우체국보험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난 천직을 만난 것 같았다. 그 사건 이후 나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졌다.
힘이 생겼고 용기가 생겼다. 당시 보험설계사를 향한 부정적인 사회적 편견은 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 내가 있는 이곳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어야 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은 보험을 준비시켜두는 일이었다.
위험에 대한 철저한 준비! 보험이 필요치 않은 삶은 없었다.
“준비하세요. 필요합니다”
하루 중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가장 많이 쓰는 단어였다.
하루하루 시간이 유수처럼 흘렀다.
난 나에게 늘 되물었다.
‘넌 고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
수없는 경험들을 통해 권하여 준비했다는 이유로 가정 지킴이 역할을 했다.
나의 권유로 인해 아빠 잃은 자녀들이 어려움 없이 대학에 진학했고, 남편 잃은 주부들이 자녀들 양육하는 데 큰 힘이 되었고 병의 위험에서 자유롭게 치료의 질을 높였으며 아픈 다리도, 부러진 허리도 다시 설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 무기가 되어 주었다.
그야말로 보험의 위력이었다.
“보험이 살립니다. 유병장수의 시대에 보험이 아들보다 든든합니다. 또한 힘들어하는 자녀들에게 병원비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자녀 사랑입니다.”
6천 명의 내 고객을 향한 관심과 권유로 지금도 나는 고객들에게 계속 유익한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이것의 나의 자존감이고 삶의 의미다.
‘준비만이 살길이다!’고 외쳐왔던 나의 인생길에도 보험을 탄탄히 준비해 두어 결국 내 인생에서도 가장 혜택을 보는 자가 되었다.
암진단비 덕분에 2년 전 암치료도 무사히 잘 마쳤지만 입사하고 나서부터 꾸준히 준비한 연금은 그야말로 평생 날 지키는 효자이다.
준비 못한 노후는 불행이다라고 생각하며 가난할 적부터 생활비 쪼개가며 준비해 둔 연금들을 지금 어디 빌딩에 아파트에 비교할 수 있으랴. 매달 입금되는 연금은 자식보다 더 나를 든든히 지켜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뿐이랴. 자녀들 앞으로 가입해두었던 연금상품들은 내 자녀들에게 훗날 든든한 엄마의 선물이 되어 평생 내가 주는 용돈처럼 받아 갈 수 있게 되었다.
위기의 때에 찾아간 우체국보험은 기회였다.
나는 고객들을 열심히 준비시켰고 그렇게 준비해둔 우체국보험이 결국 그들에게 고마운 이웃이 되었다.
나는 내 청춘 우체국보험이 정말 좋다.
하도 좋은 직장이어서 이제는 딸도 우체국FC이다.
전국 최초 모녀 MDRT는 대를 이어서 고객 지킴이의 역할을 할 것이다.
딸에게 바란다.
FC후배들에게 바란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정말 귀하고 곱다.
그러니 사명자의 모습으로 고객을 맞이하며 행복을 파는자, 행복을 지키는자 역할을 충실히 해주길 바랄 뿐이다.
생명수 샘물 되어 준 우체국보험에 정말 감사하다.
내가 파는 보험이 소액으로 서민을 상대하는 보험이기에 더욱 감사하다.
어려운 이웃의 힘이 되어 주는 우체국보험은 그야말로 이웃사랑이고 애국의 길이다.
위험에 대비하여 준비시키는 일은 선한 영향력으로 봄빛처럼 세상을 녹일 것이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할 수 있다”를 외치는 후배들의 모습을 응원한다.
그러나 결과는 되어지는 것이다.
나의 매일 나의 몫을 하는가만을 묻기만 하면 된다.
매일을 성실히 살아갈 때 다시 봄빛은 온천지를 녹여 꽃이 피고 열매 맺히리라.
주렁주렁한 열매로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고 감사도 넘치리라.
오늘도 씨뿌리며 나아가리라.
씨뿌리는 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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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좋은 나라인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4계절이 뚜렷하여 더욱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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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체국보험을 모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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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M센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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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촉촉이 내린 어느 날,
초록의 잎과 진분홍 철쭉들이 더 선명해지고 바짝 말랐던 물기를 머금은 보도블록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다. 지하철에 내려 늘 그랬던 것처럼 총총걸음으로 출근길을 재촉했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늘 바쁜 출근길이었지만 싱그러운 초록의 향기 덕분인지 자꾸 그들에게 시선이 머문다. 룰루랄라 몇 번 콧노래를 부르니 벌써 사무실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전산을 켜고 내 자리의 컴퓨터에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커피도 한잔 내린다. 너저분하고, 정리되지 못한 자리지만 난 이곳이 편하고 그런 너저분함이 정겹다. 동료들의 수다스러움과 웃음소리에 귀를 쫑긋 세워 본다.
’간밤에 무슨 일들이 저리도 많았을까?‘ 분명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일들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야기보따리도 끊임없이 풀어낸다.
일하는 시간이 되면 머리에는 멋진 왕관(헤드셋)을 쓰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한다.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파이팅을 외치며 전화번호를 누른다.
‘그렇다’ 나는 TCM센터에서 전화로 보험 상담을 하고 계약을 체결하는 전문상담사이다.
하루에 수십 혹은 수백 명의 고객을 만나 다양한 상품들을 권유하고 맞춤 설계부터 계약까지 성사하는 전문상담사이다. 전문보험상담사로 일한 지 벌써 8년째이다.
보험 일을 하기 전 웅진코웨이 정수기 회사에서 10여 년 동안 팀장으로 발로 뛰는 영업을 했다. 아파트 행사장을 쫓아다니고 초인종을 눌러가면서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전단 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가가호호 붙여가면서 그렇게 힘들지만, 열정적으로 일을 했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면서 사람 만나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서로 경계하고 꽁꽁 닫힌 마음에 문은 더 정수기 시장을 얼어붙게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전화 영업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수백 명을 고객을 발로 뛰지 않아도 편하게 만날 수 있다니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들으면서 보험영업을 지원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고, 좋은 기회로 보험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길만 달려왔고 우체국에서는 보험 상담을 시작한 지 벌써 4년이 되었다.
전화로 방방곡곡 우체국 고객을 만나고 느끼는 점은 대부분의 고객은 정이 많고 착하다는 점이다. 직원에게 욕을 하거나 하대하는 고객들도 거의 없으며, 종종 안부를 묻거나 고맙다는 인사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말한다.
“고객님 항상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오늘도 참으로 고맙습니다. 오늘도 바쁘실 텐데 제 전화를 받아주셨군요”
감사가 넘치니 하는 일도 신명 난다.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보험 상담에서 어르신 고객을 많이 만난다. 어르신 고객의 최대 관심사는 건강한 노년이다. 특히 병원비 부담은 본인 및 친구, 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므로 최소한 1개 이상의 보험에 가입되어있다. 최소한의 안전망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남에게 폐 끼치고 신세 지는 걸 싫어한다. 그것이 자식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보험은 재산도 지켜주고 아플 때 목돈 받아서 여러모로 쓰이니 효자, 효녀처럼 든든하다.
전화 영업을 오래 하다 보니 열 길 물속에 물고랑이 보일 때도 많고 한 길 사람 속까지 뻔히 보일 때도 많다. 어떻게 하면 매출이 좋아지고 계약으로 이어지는지 고객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해피콜은 정기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이론적으로는 전문이지만 꾸준한 실천은 매우 어렵다.
오래전부터 몸에 베어 있는 고정관념과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새로운 일이나 새로운 상품들을 두려워한다. 귀찮아하는 버릇 또한 한몫한다. 꾸준히 공부하고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뒷걸음치지 않고 그나마 같은 동종업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방법인 것 같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고객님이 찾아오거나 전화 오기만 기다려서는 원하는 성과를 이룰 수 없다. 전화 영업이든 현장 영업이든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영업은 정직하다. 내가 뛴 만큼, 내가 전화를 돌린 만큼, 일에 시간 투자를 한 만큼, 딱 그만큼의 성과이다. 하루에 한 사람은 10명의 고객과 전화로 만난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100명의 고객을 만난다고 가정한다면 그 결과가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그 사람의 스킬과 약간의 운, 그다음이 지속적인 고객관리이다.
보험의 필요성은 고객들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누구나 내 고객으로 만들 수 없다.
상품을 비교하기보다는 아직도 사람과의 친분과 정을 중요시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영업 세계에서는 변한 것이 없다.
고객 관리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고객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나중에는 기존 계약도 해지할까 걸려 오는 전화도 두렵다. 하지만 이미 나와 고객들과의 신뢰와 믿음이 생겼다면 오는 전화도 반갑고 소개 추천도 들어온다. 고객 전화에 두려움도 없다.
나를 살찌우게 하는 나의 고마운 고객들이기에 꾸준한 고객 관리는 아주 중요하다.
영업은 고객과의 믿음과 신뢰가 없다면 오랫동안 일하기 힘들고 권태기가 자주 찾아온다.
초기 투자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매달 월세를 걱정하는 자영업자도 아니고 우리는 노력으로 실적이 쌓이고 실적으로 급여가 만들어지고 성과로 인정받는 아주 정직하고도 매력적인 일이다. 또 하나의 매력은 매달 월초가 되면 판이 다시 깔린다는 것이다.
상위자나 하위자나 똑같이 월초에는 일이 새롭게 시작되니 실적이 안된다고 억울할 일도 자존심 상할 일도 없다.
고집도 버리자.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최선은 아니다. 고소득자들은 그들만의 노하우가 반드시 있다. 동료가 일이 잘되면 부러워하고 배만 아파할 것이 아니고 인정하고 배워야 한다.
끝없는 열정과 노력, 땀방울만이 나를 성장시키고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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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촉촉이 내린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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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체국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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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지방우정청 강릉우체국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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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우체국은, 나의 성장을 함께하고 지금까지도 나와 동행 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파트너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 내신 점수에 필요한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기 위해 우편실과 택배실을 방문하였다. 당시에 아버지께서 우체국에 근무하고 계셨기에 다른 봉사활동처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우체국이었고, 우체국 외에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미래를 알지도 못할 때부터 우체국을 알아가고 있었다.
중학생이 된 어느 날, 나와 동생이 스스로 밥을 차려 먹기 시작하자, 어머니께서는 중대 발표를 하셨다. 전업주부의 삶을 마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로...그 일이 우체국보험 설계사라는 것은, 내가 대학생이 되어 보험 청약서에 싸인을 하고 있는 나를 인지할 때쯤이 되어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난 우체국보험 설계사의 일을 일찍부터 조기교육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군대를 마치고 전역한 후에는, 미국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나름 미국 전문대 과정을 마친 유학파이다. 3년 반이라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보험설계사라는 직장이다. 페이*북을 통해 본 보험설계사의 모습들은 화려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들의 삶은 부유했고, 여유로워 보였다. 내가 꿈꾸던 직장인의 모습이었고, 내가 꿈꾸던 삶이었다.
그렇다. 우리 어머니도 보험설계사였다. 내가 보던 민영보험사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그땐 몰랐다, 우리 어머니가 이미 우체국 명인이시고, 억대 연봉이셨다는걸.... 그 돈으로 나와 내 동생을 유학 보내셨다는걸...)이긴 했지만, 우리 어머니도 우체국 보험설계사였다는 걸 자각했다. 그때부터이다 나도 우체국보험 설계사가 되어보겠다고 다짐 한 것이...
2015년 10월 19일 나는 드!디!어! 강릉우체국 FC가 되었다. 그렇게 난 보험설계사가 되었다. 출근한 지 1주일 정도 되었을까? 내가 꿈꾸고, 이미지 그려 보았던 삶과 실제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아들과 함께 같은 사무실에 있는 어머니는 눈길 한번 주지 않으셨고, 보험을 팔아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나에게 보험이 무엇인지,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현실은 냉혹했다. 나갈 곳이 없고, 시간은 자꾸 흐르고, 보험은 아직도 생소하고, 초초한 마음들로 힘들어할 때, 집에 있는 아내와 자녀들이 생각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아들이 아니다. 내 가정을 지켜야 할 가장이다.
15년도에 강릉우체국에 입사한 동기FC들이 나를 포함해서 총 5명이 있었다. 동기라고 하지만 모두 어머니뻘 동기들이었다. 우리는 1주일에 1번 같이 식사를 하며, 1주일 동안 영업했던 경험을 나누기 시작했다. 좋았던 일, 힘들었던 일, 보험계약을 유치했던 일 등등... 경험을 나누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상품에 대한 공부도 함께 했다. 상품을 알려주고 내용을 정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역할은 당연하게도 제일 어린 내가 맡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때 함께 한 스터디 모임이 지금의 MDRT까지 오르는데 초석이 되었다고 본다. 타인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은 몇 배나 더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 30분 정도 스터디를 위해 나는 2~3시간을 상품 공부에 시간을 써야만 했다. 상품 안내장은 당연하고, 약관을 뒤져보기도 했다. 이 시간, 우체국보험 전체를 꼼꼼히 마주하며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 강원청 명 강사로 활동하는 내가 신인FC들에게 꼭 강조하는 것이 바로 공부이다. 특히 약관 공부. 상품을 아는 것이 곧 자신감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하였다. 고객을 휘어잡은 말. 고객에게 신뢰를 얻는 말. 그 말은 지식에서부터 비롯하여야 함을 신인FC에게 가장 강조하고 싶다.
상품에 대하여 자신감이 생기자 개척 활동에 대하여도 자신감이 생겼다. 게다가 동기들과의 스터디를 통해 [어느 날, 어느 시간에, 어디를 가야 할지]도 확실하게 정리가 되었다. 혼자서 했다면 몇 년이 걸릴 경험과 노하우를 동기들과 스터디를 통해서 몇 달 만에 정리가 되었다. 상품에 대한 자신감과 가야 할 곳이 생기자 나의 직장생활이 바빠지게 되었다. 영업사원이 바쁘다는 것은 곧 수입이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스터디 모임은 1년 동안 계속되었다. 꾸준하게 모였고, 꾸준하게 나누었고, 꾸준히 공부했다. 신상품이 나오면 더더욱 공부하였고 1년이 지나자 이제는 타 보험사의 상품들과도 비교하게 될 수 있었다. 그 경험이 고객의 보험 보장분석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입사 2년 만에 2017년 나는 연도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어머니와 함께...
한 번 자리 잡은 공부 습관은 7년 차가 된 지금에도 이어오고 있다. 이제는 동기들과 하는 스터디 모임 대신에, 명 강사로 임명되어 강원청 곳곳을 돌며 신입FC들과 저 실적FC들을 대상으로 스터디 경험을 나누고 있다. 딱 1년, 1년 동안 만들었던 스터디 습관이 평생의 습관을 만들어 주었다. 여전히 신상품이 나올 때면, 약관까지 공부하고, 세법이나 보험 외 지식이 필요할 때면, 국세청, 관공서 등 담당 부서를 통해 답을 찾으며, 그 내용을 토대도 FC들에게 강의할 준비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그렇게 7년, 드디어 나와 어머니는 우체국 모자 MDRT가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우리는 그렇게 우체국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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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우체국은, 나의 성장을 함께하고 지금까지도 나와 동행 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파트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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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타래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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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지방우정청 북대구우체국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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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치매에 걸린 시부를 떠나보내며 내 인생은 엉킨 실타래처럼 꼬였다. 그것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내 어깨의 진통은 멈추지 않고, 내 추락한 자존감은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것 같았다.
회색빛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S씨, 남편이 돌아가셨어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걸려 온 고객 전화는 70대 중반의 공장 사장님의 부고장이다. 순간 5년 전 공장이 부도나고 두 부부가 동반 자살을 하려고 가입해 있던 보험을 다 해약해 버리고 산속을 헤매다 일주일 만에 돌아와 울먹이던 것이 생각났다. 내 예감대로였다. 고인의 죽음이 자살인지라 일가친지는 물론 지인들에게도 알리지 못했단다.
자살은 경찰의 조사까지는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는 모양이라 언제 장례를 치를지도 모른단다. 아마도 내게 전화를 한 것은 평상시 고인과 잘 알고 지내는 터라 조금이나마 자신의 힘든 마음을 나누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달란 마음도 담겨 있으리라.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고인은 지금 저 푸른 하늘 어딘가로 휠 휠 날아다니고 계실까?’ 생각하면서 잠시 고개 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다.
며칠 뒤 고객 집을 찾았다. 평상시보다 매우 수척한 얼굴이 안쓰러웠다. 고객을 보는 순간 후회가 물밀듯 밀려온다. 보험료가 비싸진다는 생각만 하고 좀 더 고객을 설득할 생각을 안 하고 사망 특약을 뺀 것이 미안했다. 순수 보장형인지라 나올 보험금이 없다는 사위의 말을 들었다며, 보험금을 포기하겠다는 것을 겨우 설득했다. 나는 멀리 있는 고객의 자녀에게 연락하고 한 달이 지나서야 보험금을 청구했다. 며칠 뒤 그녀가 보험금이 입금됐다며 계좌번호를 달라고 했다. 일백만 원이 되지 않은 보험금을 받고 사례까지 할 생각하다니 순간 나는 너무 감격해서 말했다.
“언니 이 돈 내가 받았다 치고, 내가 도로 언니에게 이 돈을 줄 테니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제발 죽지 말고 잘 살아 줘요.”
고인의 부고 전화 받던 날부터 혹시나 남편을 먼저 보내고 이 언니마저 나쁜 마음을 먹을까 하는 염려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뒤에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가 “S씨를 봐서라도 내 잘 살게.”라고 했다.
나는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심한 몸살을 앓았다. 졸지에 미망인이 되어버린 그 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언니 집 형편만 생각하고 보장이 큰 보험을 권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20여 년 전, 처음부터, 고객의 가정이 평온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부터, 충분한 여유자금과 노후 연금, 보장성 보험을 가입시켜 주지 못함을 백 번도 후회했다. 지금 와서 소용없는 일이지만, 제대로 말도 못 한 것을 후회했다.
26년 동안 우체국 FC로 근무하는 나는 고객들이 많다. 사실 요즘은 거의 매달 고객들이 암을 진단받고, 뇌경색, 뇌출혈, 급성심근경색 등 중병을 진단받는다. 심지어는 사고로 장해 진단을 받는 고객도 더러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객에게 가입시켜 준 보험은 충분한 보험금이 나올까? 하는 염려로 식은땀이 흐른다. 나의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15년 전에 이런 일도 있었다. 고객의 딸이 유학 다녀와서 어깨가 결려 병원에 갔더니 갑상샘암이었다. 그때 받은 보험금은 2천만 원이었다. 그 고객과는 평상시 막역한 사이인데, 고객이 보험금을 확인하고 대뜸 나에게 우리 아들 보험은 어떻게 가입되어 있는지 보자는 것이다. 그 고객 말투에는 ‘너의 딸이면 이렇게 보험 가입해 두었겠냐?’는 것이다. 제법 부유한 그 집 형편에 맞는 보험설계를 못 하고 거절이 두려워 ‘추가 보험에 가입시켜야지’ 늘 생각만 하고 말도 못 꺼낸 것이다. 그날 나는 아들들 충분한 보장성 보험과 노후 연금에 가입해 둔 것을 고백했다.
그 일 후 몇 번을 그 고객 집을 들락거리며, 그 고객의 가족 보험을 온 지식을 총동원하여 설계하고 또 설계를 반복한 뒤에 추가 보험에 가입해주었다. 지금도 내 귀에는 “나는 S씨만 믿고 딴 사람한테 보험 상담 한 번도 안 했는데.”라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시아버님을 하늘나라로 보낸 후 나는 지친 개인사를 핑계로 보험 가입시키는 일을 등한시했다. 연일 중병과 사고가 일어나는 엉킨 실타래 같은 고객들의 가정에는 보험금이 꼭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고객들이 가입하지 않아서’라는 핑계를 대며 빈둥거렸다. 그러다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리는 ‘고객들의 죽음과 중병으로 인한 불행과 파탄의 책임은 너한테도 있잖아.’ 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잘못 산 삶은 돌아보지 말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생각하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문제, 내가 필요한 고객들만을 생각하자.
오늘도 유난히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따스한 봄 울림이 나를 다독인다. 그 기운에 나는 힘이 솟으며, 나의 길을 용기 내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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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치매에 걸린 시부를 떠나보내며 내 인생은 엉킨 실타래처럼 꼬였다. 그것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내 어깨의 진통은 멈추지 않고, 내 추락한 자존감은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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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지원시스템을 활용하여 계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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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지방우정청 의정부우체국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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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의정부우체국 FC 신○○입니다. 제가 우체국보험 영업을 시작한 지 벌써 150개월 차가 되었네요. 처음 우체국보험을 시작하였을 때는 고객 창출이 최우선이였습니다. 3년 동안 날마다 개척 활동을 통해 지금의 고객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보험영업 많이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환경에 적응하는 자가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항시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신규 고객 창출도 중요 하지만 그 무엇 보다 기존 고객 관리도 중요합니다.
저는 “영업철칙 3가지 다짐”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데요.
제 철칙은 민원 제로, AS 철저히,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지 않기입니다.
코로나 위기 시기에도 그 전년도 보다 실적이 줄지 않고 올랐던 것은 평상시 저의 3가지 철칙을 철저히 이행하였기에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코로나 때 갈 곳이 없어서 계약이 줄어든다고 하였는데 저는 위의 내용과 같이 영업지원시스템을 활용하여 모바일이나 우편발송을 하거나 전화 통화로 영업을 하였습니다.
최근에 계약한 내용입니다,
이분은 유지관리자 퇴직으로 제게 이관된 고객인데요. 평상시 문자 서비스로 유지관리자 신○○입니다. 주소 전화번호 변경이나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십시오 라고 보냅니다. 이 고객은 지속적으로 나를 관리를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우체국보험을 들어 있긴 한데 제대로 되어 있는지 궁금하고 갱신보험료가 너무 많다고 한번 만나서 듣고 싶다고 전화를 주셨어요. 저는 이렇게 문의가 들어오면 타사와 우체국보험의 보장을 분석한 자료를 만듭니다. 기지급금 조회를 하여 건강한지 아니한지를 파악을 하고 제시할 자료를 만듭니다. 복합 설계하여 제대로 된 종합보험으로 만들어 설명드리면 아주 만족해하셨고 계약이 성사되었으며 가족 모두 같은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상품으로 추가 계약도 예약해 놓은 상태입니다.
상품을 복합설계를 하여 가성비 좋은 우체국보험을 판매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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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의정부우체국 FC 신○○입니다. 제가 우체국보험 영업을 시작한 지 벌써 150개월 차가 되었네요. 처음 우체국보험을 시작하였을 때는 고객 창출이 최우선이였습니다. 3년 동안 날마다 개척 활동을 통해 지금의 고객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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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보험! 나는 이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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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방우정청 북광주우체국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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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나는 이렇게 한다.
몸도 마음도 아파서 지쳐 있을 때 누군가가 많이 그리워 얼굴 보는 것만도 반가워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예쁜 찬합(도시락)에다 갖가지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해서 함아름 가지고 가면 고객은 기절한다^^
한번은 어떤 50대 여자 고객이 입원했는데 위와 같은 방식으로 도시락을 맛있게 푸짐하게 준비해서 병문안을 갔다. 병실 온 식구들과 나누어 먹고 너무나 감사하다고 이런 감동은 처음이라고...몇 번을 얘기했다. 내입장에서는 더 행복했다.
그러하고 몇 개월 후에 전화가 왔다. 오늘 친구들을 초대해서 보험도 소개하고 점심을 해 먹기로 했으니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물품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갔더니 친구분들이 보험을 가입하고자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걸 볼 때 난 재물의 재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람이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날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소중한 나의 재산을 쌓아간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직업을 널리 알리는 일 또한 열심히 한다.
일자리 없는 이들에게 JOB을 안겨줘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있는 우리 우체국 FC들이다.
12년 동안 일해오면서 수많은 고객들이 머릿속에 있지만 그중에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몇 년 전에 40대 남자 고객이 삶의 무게에 못 이겨 갑자기 급성심근경색증이 왔다. 다행히 골든타임 안에 처치한 덕에 살았고 치료도 잘 받아 경과가 좋은 경우다.
그 고객한테 9천6백만 원 정도의 보험금이 지급되어서 무거운 빚도 정리하고 생활의 여유가 생기니 하는 사업도 잘 된다고 했다. 참으로 생각할수록 보람된 일이고 뿌듯하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장애인 부부인데 “만원의행복보험”을 가입했다.
어느 날 밤 경운기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여기 또한 부부에게 4천만 원의 보험금이 지급되었는데 남은 자녀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서 그나마 위안을 얻은 경우다.
그 후 그 일대 시골에서 보험소개가 많이 들어왔다.
이렇게 보험이란 한 가정을 살리고 남은 유족에게 도움이 되는 엄마의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FC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다.
고객들이 가끔 묻는다.
“잘하고 있느냐” “힘들지 않으냐”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네!~ 너무 재미있어요. 보험 일이 이렇게 즐겁고 할만한 일인지 더 일찍 할걸. 그랬어요~”
긍정의 이미지와 밝은 미소를 보여야 고객은 안심하고 보험 관련은 나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힘들 때도 많지만 그래도 “못 해 먹겠다. 그만두고 싶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우린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신입 FC들은 이 부분에 더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다.
언제 그만둘지 모를 것 같은 FC에게 누가 보험을 가입하겠다고 소개를 한다고 연락하겠는가....!
요즘은 장수시대로 부모의 노후 걱정을 자식들이 많이 한다.
울 아들은 “엄마 나 애기봐달라고 안 할 테니 우체국보험일 오래오래 재밌게 하세요~”
“그게 엄마의 행복이고 연금이에요~”
“난 돈 버는 엄마가 너무 멋져요~”하면서 고객 발굴에 앞장서서 도와준다. 그런 아들이 고마워서 낮에는 절대로 집에 있지 않고 매일 출근한다.
정년이 없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응원하는 우체국보험FC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으로 행복하다.
직업 중에 아주 괜찮은 JOB으로 꼽고 싶다.
자녀들까지도 엄마의 하는 일을 응원하니까 더 힘이 나고 내일이 기다려진다.
오늘 하루도 행복함으로 보험설계사의 하루를 마감한다.
언젠가 우리국 행사 때 발표했던 나의 자작시 한편을 소개한다.
<님을 향한 노래>
당신의 고귀한 삶이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속에
수없이 흘렀습니다
바람을 막아주는 큰 나무처럼
쉼을 주는 나무의 그늘처럼
고귀한 당신
우리가 빗물되어 흐르면
당신은 강물이 되어 그 빗물 다~품고
우리가 낙엽되어 쌓이면
당신은 그 낙엽을 발효시켜 밑거름이 되고
우리가 흩날리는 눈이라면
당신은 사철 푸른 소나무에
아름다운 눈꽃으로 피어나십니다
한평생을 우체국에서 웃고 때론 울고
그리고 행복했기에
다시오는 이 봄에 꽃을 피웁니다
백세 인생의 대표주자로
우뚝 설 것입니다
고귀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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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나는 이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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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난혼자가 아니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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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지방우정청 세종우체국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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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면서 ]
내 인생 2막의 시작과 같은 우체국FC로서 지내온 시간 동안, 시작부터 지금까지 친구처럼 때론 선생님처럼 내 인생의 비타민이 되어준 김보람FC에게 이 글을 빌어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한다.
프롤로그
나는 지금 거울 앞에 서 있다. 아니, 사실은 거울처럼 내 모습이 비춰지는 쇼윈도 앞이다. 매번 상가에 사장님들을 만나러 들어가기 전 쇼윈도 앞에서 비춰진 내 모습을 확인하고 들어가다 보니 이제는 쇼윈도가 마치 거울 같다. 평소 같으면 쇼윈도 앞에서 잠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지나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오늘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은 나를 마주할 상대방 눈에 비춰질 내 모습에 대한 평가를 보는 것 같아서 유난히 긴장되고 발걸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래도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하기에 "긴장을 가라앉히고, 당당함을 보여야 해!"라고 되뇌이면서 잠시 눈을 감고 2년 가까이 FC로서 인내해 온 나의 여정을 잠시 떠올려 본다.
해외 우편처럼 찾아온 전화 한 통
2년 전 초여름, 여느 때처럼 어머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직 나름 지적으로 보여지는 영어 과외교사로도 일해보고 남편 일을 도와서 입주 청소일도 해보았지만, 몸이 아픈 가족을 지속해서 돌보아야 하는 일만큼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힘든 일은 없는 것 같다. 어머니가 투병 생활을 해 온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얼마 전 큰 수술을 받으시고 활동의 제약이 더 많아지면서 누군가는 전 시간 간병을 해야 했고, 결국 내가 모든 일을 그만두고 엄마 옆에 있기로 했다. 그로 인해 간병일의 특성상 전 시간 직장을 갖는 건 불가능해졌고 그마저 가능했던 가끔씩 남편의 입주 청소일을 도와주는 것도 더 이상 어려워져서 경제생활의 압력을 견디는 것도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다.
(여기서 잠시, 우리 남편 얘기를 해보자면 우리 남편은 참 성실하지만, 정직하게 일한 만큼 벌어오는 사람이라서 여유분의 소득을 벌어오도록 압력을 주면 그만큼 더 많이 일을 해야 해서 지쳐 쓰러질 수도 있다. 몸도 좀 아끼면서 융통성 있게 일하기를 바라지만, 이 남자의 착한 본성을 아는 만큼 불만도 없고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엄마한테 신경 쓰느라 남편에게 소홀해져도 불평 없이 다 이해해 주니 말이다.)
이렇게 엄마를 간병하면서 점차 자존감도 낮아지고 사회생활에 대한 감도 사라져 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어쩌다 한번 엄마 입맛에 닿는 식사 한 번 준비하느라 다행스러운 마음과 지쳐가는 마음이 교차하던 중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사실 음식 준비에 바빠서 그냥 넘길까도 싶었지만, 왠지 안 받으면 미안해질 전화일까 싶어 통화연결 버튼을 쓱 눌러봤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솔'에서 '시'를 넘나드는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 언제나 긍정적이고 얼굴에 '맑음'이라고 쓰여있는 듯해서 같이 있으면 행복한 사람. 보람이였다.
"언니~~ 잘 지냈어요?^^"
○○이의 첫인사였다. 통화를 하면서 잠시 내 일과를 내려놓고 나눈 대화는 흥미롭고 신선함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만큼은 건조한 마음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상쾌함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대화 가운데 보험 영업일을 해보라는 제안이 선뜻 마음에 와닿는 일은 아니었다. 거부감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친근함이 없어서 두려웠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거절도 하고 재차 제안도 받았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보람이가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절은 하면서도 머릿속에 그려 보고 또 그려 보았다. 함께 일해보자는 ○○이의 제안은 마치 해외에서 온 우편물을 받았을 때처럼, 낯설어서 열어보기 두렵기도 하지만 내용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생기는 것과 같았다.
"혹시 나를 너의 나라로 초대하는 거니?“
인생 제2막의 시작.
○○이의 안부 전화를 계기로 보험설계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이는 이미 수년 전부터 우체국 보험팀에서 일하고 있었고, 본래 이타적인 성향의 친구였기 때문에 나에게 힘든 일이 있으면 도움도 주고 또 보험에 대해서 상담도 잘해주는 정말 마음이 가는 친구였다. 그 친구의 본이 되는 태도와 행동 때문이었는지 내가 보험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고 정말 망설여지는 일이었지만, 결국 마음을 열고 보험 업계에 발을 딛게 되었다. 우선은 개인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해서 엄마를 돌보는 일과 병행해서 할 수 있는 점이 좋았고 홑 벌이를 하고 있는 남편의 짐을 줄여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하긴 하였는데,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산과 같은 걸림돌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신입교육과 선배들의 조언을 들어보면 영업의 시작은 주변 지인들부터라는데 막상 내 옆을 둘러보니 내가 접근해 볼 지인이라고는 정말 다섯 손가락을 채우기도 힘들 만큼 적었다. 그나마 무촌과 1촌 가족(남편과 부모님)을 제외하면 V자를 그릴 때 쓰는 검지와 중지 안에 꼽히는 친인척이 있을 뿐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앞으로 어떻게 일해가야 할지 막막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나에겐 왜 이리 지인이 없을까?' 정말 고민이었다. 그도 그럴만한 게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아픈 엄마 옆을 떠날 수 없었기에 학교 다닐 땐 수업을 마치고 바로 집, 직업을 갖고서도 일 끝나면 바로 집으로 향하는 삶을 살았다. 사적으로 모임을 하거나 사생활을 즐기는 삶은 기억 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인간관계가 좁게 살아오다 보니 영업은커녕 "나 보험 한다"라고 자기소개 한번 해볼 대상이 없었다. 정말 낙담이 되었고, 그렇게 암담한 심정으로 신입기간 한 달을 보낸 것 같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 3개월이 넘어가면서 자연스레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언제까지 가족들을 조리대에 올려놓고 가족 볶아치기와 친인척 우려먹기 요리를 해야 할까? 계속 그럴 순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며 선배들의 조언을 들어본 끝에 영업의 꽃이자 배수진이라 불리는 "개척 영업"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힘든 일이었고 개척 영업을 하면서 배우게 된 삶의 교훈들은 정말로 내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된 ‘인생 제2막의 시작’이었다.
내가 엄마를 돌보는 일로 온전히 보험 일에 집중할 수 없을 때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고 위로해준 우리 FC실 가족들, 오래전이긴 하지만 젊은 시절 보험 일을 했었던 경험으로 나를 격려해준 우리 엄마, 계약 한 건 없이 집에 들어와도 나의 일을 존중해 주고 집안일에 함께 수고해주는 우리 남편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 외에도 한때는 나에게 실망감이나 아쉬움을 주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깨달음이나 교훈을 준 영업 하면서 만났던 분들, 그리고 결국 계약자가 되셔서 나의 든든한 지원자가 돼주신 고객분들께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어쩌면 내가 어느 사람 앞에서도 겸손한 자세를 갖도록 틀 잡아준 사람들이 그분들일지도 모른다. 결국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은 결코 혼자서 해 온 일이 아니며 앞으로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에필로그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잠시 감았던 눈을 뜬다. 나는 여전히 쇼윈도 앞에 서 있고, 곧 또 한 명의 잠재 고객을 만나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긴장되지 않는다. 나는 여러 사람이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당당하다. 좀 전에 나는 쇼윈도에 비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쇼윈도 앞에는 나와 나의 파트너 보람이도 있기 때문이다. 보람이는 해외에서 날아온 우편처럼 나를 설레게 하더니 내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면서 다시 한번 성장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든든하게 내 옆에 서 있다. 우리는 서로 보완해주는 환상의 파트너다.
앞으로도 보험이란 일이 나에겐 도전이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괜찮아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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